부산-시민 주도 첫 ‘나무권리선언’ 발표
광주-‘가로수 지키기 위해…’ 모임 결성
서울-가로수지도 작성·설문조사등 활발
간판을 가린다고, 하수관 공사를 한다고, 너무 크다고 갖은 이유로 베어지고 잘려나간 부산시 도시나무들. 부산그린트러스트 제공
“차 좀 빨리 다니게 한다고, 시민 의견도 듣지 않고 공사책임자 결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나무 베는 일, 이젠 막아야 하지 않을까요?”(이성근 부산그린트러스트 상임이사)
매년 2월 중순~5월은 가로수와 공원 나무들의 가지치기가 이뤄지는 때다. 어린나무일 때 모양을 잡아 다 큰 뒤엔 3∼5년에 한번씩 가벼운 가지치기(약전정)을 하는 미국·유럽과 달리, 한국 주요 도시들은 매년 이 시기에 센 가지치기(강전정)를 반복한다. 과도한 가지치기는 비용은 물론 미관에 좋지 않다. 여기에 온실가스를 줄여주고 열섬현상을 완화하는 도시나무들을 병들게 한다는 지적이 수년 전부터 환경단체들을 중심으로 터져 나왔다. 최근엔 서울·부산·광주 등 대도시 ‘기성’ 시민단체들도 도시나무 지키기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어 관심을 끈다.
부산에서 첫 시민주도 ‘나무권리선언’
“우리는 나무와 숲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나무는 생태계를 이루는 핵심존재로서 탄소중립, 기후위기시대 인간의 과도한 욕구와 필요에 의해 착취당해서는 안된다. 나무는 지구의 일원으로 참여할 권리가 있다.
하나. 나무는 지구에서 고귀한 생명을 가진 존재이다. 하나. 나무는 자기 생육 공간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하나. 나무는 인간과 공존하며 공생할 권리가 있다. 하나. 나무는 역사·문회·생물유산으로서 권리를 가진다.
하나. 나무는 부산시민으로부터 법과 제도로써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지난해 12월15일 부산 생명의 숲·부산그린트러스트·부산환경회의·부산시민운동단체연대는 ‘부산 나무권리선언’을 발표했다 . 전국 최초로 시민 주도로 만들어진 나무 관련 선언이었다 . 지난 2016년 시작된 부산 중앙버스전용차로 ( BRT) 정류장 공사 때 가로수 수만그루가 베어지거나 이식된 뒤 고사한 게 계기가 됐다 .
또 2017년 수령 500살인 주례동 회화나무가, 2019년 11월 부산시청 앞 수령 70살 노거수 느티나무가 나무 생리에 관한 고려 없이 이식된 뒤 고사해 많은 공분을 사기도 했다.
이성근 부산그린트러스트 상임이사는 와 한 통화에서 “그간 도시나무들은 실로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지만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해 뿌리 없는 삶을 강요받았다. 자동차 운행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 등으로 베어졌고, 볼품 없는 몰골로 서 있다. 이런 마구잡이 가로 행정을 비판하는 그간 활동의 결과로 ‘도시숲 조성 조례’가 통과됐고, 부산시의회에서 부산나무권리선언을 발표했지만, 기사도 거의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들은 최근 반려동물 보호가 법제화되는 흐름인데, 나무도 다를 게 없다고 본다. 이 상임이사는 “관련 조례가 통과됐지만 아직 부족하다. 이 조례가 선언에 그치지 않고, 일상적인 지침이 될 수 있도록 과거 보행권리 장전과 같은 방식의 나무권리선언을 발표했고, 시 정책에 꾸준히 반영되도록 하려고 한다”며 “부산시민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전국적으로 연대해 바람이 불어야 (부산시 행정이) 바뀔 것 같다. 탄소중립을 향해 매진하지 않으면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시대 아닌가. 나무는 이 도시 미래를 책임지는 핵심주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11월 광주시 염주주공 재건축사업으로 가로수 118그루가 무참히 베어져 나가자 시민 271명이 ‘가로수를 지키기 위해 뭐라도 하는 시민들’ 모임을 결성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광주환경운동연합 제공
광주시민들 “가로수 위해 뭐라도” 모임 결성
광주에서는 지난해 12월 광주환경운동연합이 주축이 돼 시민 271명이 참여해 ‘가로수를 지키기 위해 뭐라도 하는 시민들’이 결성됐다. 11월28∼29일 이틀 만에 염주주공아파트 재건축사업을 위해 도로가 확장되면서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메타세콰이어 118그루가 몽땅 잘려나간 일이 계기가 됐다. 광주시나 서구청이 시민들에게 의견을 묻거나 알리는 절차도 없었다고 한다.
이들은 지난해 12월27일 광주시에 다음 6가지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1. 가로수는 도로와 도시개발의 장애물이 아닌, 걷고 싶은 거리, 즐거운 보행을 만드는 자원으로 관리되어야 한다.
2. 기후위기와 탄소중립을 위한 가로수 관리가 필요하다.
3. 가로수 현황 데이터를 구축해야 한다.
4. 30-40년 된 도시 나무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5. 가로수 관리의 시민참여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6. 도시숲조례개정을 통해 가로수 제거에 대한 심의 기능이 강화되어야 한다.이경희 광주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은 “광주시 곳곳에서 (과도한 가지치기로 닭발을 뒤집어 세운 것처럼 생긴) 닭발가로수가 넘쳐나고, 가로수 조성과 관리이력, 수목상태를 진단·평가하는 체계는 마련돼 있지 않다. 제2, 제3의 염주주공 가로수 제거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광주시가 가로수 의미와 가치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에 걸맞은 관리를 할 것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광주환경운동연합은 올해는 시내 가로수 지도그리기 등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지난해 서울에서도 도시나무 지키기와 관련해 전에 없던 시민활동이 시도됐다. 서울환경연합(옛 서울환경운동연합)은 지난해 3월 신사동 가로수길 가로수들을 모니터링해 두절(머리를 쳐내듯 줄기만 남기고 모든 가지를 제거) 등 무분별한 가지치기 등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또 5월엔 가로수 관리와 관련된 시민 설문조사도 진행했다. 시민 528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길거리에서 흔히 보는 가로수 모습이 어떠한가’라는 질문에 응답자 64.4%가 “보기 흉하다”고 답했고, 강전정 위주 가지치기 방식도 응답자 84.4%가 “좋지 않다”고 했다. 무리한 가지치기 탓에 가로수들이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답변도 75.2%에 달했다.
지난해 6월엔 강득구·강준현·김성환·맹성규·윤준병 의원 주최로 사상 첫 ‘가로수 가지치기 개선방안 모색 정책토론회’가 열리기도 했다. 자연의벗 연구소는 시민들과 함께 지난 9월 마포구 일대에 ‘가로수 지도 만들기’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최영 서울환경연합 활동가는 “기성 시민환경단체가 가로수 문제를 제기한다는 건 사실 생소한 일이다. 그럼에도 올해는 전국적으로 연대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전망했다. 서울환경연합은 지난해 처음으로 주요 활동으로 가로수 관련 활동을 소개하기도 했다.
2021년 서울환경연합은 사람과 자연이 공생할 수 있는 도시구조를 되찾기 위해 활동했습니다. 다양한 생태계서비스를 제공하는 그린인프라를 보호하고 또 확대해 나가기 위해 지역사회와 함께 새로운 의제들을 제안했습니다. 대표적으로 과도한 가지치기로 고통받는 가로수의 이야기를 알리고 제도 개선을 위한 활동을 진행했습니다. (중략) 요즘에는 가로수를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 ’올바른 가지치기 가이드북’을 제작하고 있습니다.(‘서울환경연합 2021년 활동보고’)
최진우 서울환경연합 생태도시전문위원은 “무자비한 가지치기에 대한 활발한 시민제보가 언론보도로 이어져 시민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고 평가한다. 국회토론회까지 개최됐고 여러 오피니언 리더들이 가로수보호 관련 법제도와 정책의 개선을 촉구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올해는 국내 실정에 맞는 바른 가지치기 안내서를 제작하고 여러 지역에 배포하여 가로수 제모습 가꾸기에 시민이 참여하는 가로수 민관공동관리 모델을 만들도록 하려고 한다”며 “제도적으로 과도한 가지치기와 뿌리 훼손을 금지하고 공개공지 및 공동주택 수목을 공공재로 관리할 수 있도록 전국적인 시민운동을 이어나갈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김양진 기자 [email protected]